만추(晩秋)에 뒤 돌아 보는 삶
경산 류 시 호 /
시인 ․ 수필가
지난 9월 중순, 큰 손주 돌을 앞두고 며느리가 젖을 뗀다고 우리 집으로 왔다.
아내가 몸이
아파하면서도 손주가 혼자 활동을 하려면 시기에 맞게 젖을 떼야
한다며 달래고 먹이며 놀아주고 잠을 재웠는데 다행히 엄마 젖을 찾지 않고
잘 지내게 되었다.
1년 전 손주가 태어날 때 우리 부부는 아들보다 더 좋아했고 축하를 해주었다.
아들 어릴 때는
필자가 일찍 출근하고 늦게 귀가하는 회사라 제대로 챙겨주지
도 놀아 주지도 못한 것에 비하면, 이제는 그때와 달리 여유가 있기에 더
사랑
스럽고 기뻤다.
집집마다 아기의 탄생이 주는 축복과 행복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크다.
부부가 힘든 삶의
여정에서 넘어져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작할 힘을 주는 것
이 바로 아이다. 가정에서 출산은 삶에서 가장 큰 축복이다.
그동안 아내는 수호천사 역할을 하면서 묵묵히 가정을 꾸려왔는데, 요즘 젊은
부부들은 주말이나 평일 퇴근 후에도 남자들이 집안일을 많이
하는 것을 본다.
중년을 넘은 필자도 바깥일보다 가정의 일에 우선을 두고 돕기로 마음먹었다.
백년해로하는 부부를 천생연분이라고
부르는데, 조금이나마 일조를 하며 사는
게 현명 한 것 같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것은 끈이다. 특히 혈연으로
맺은 자식이나 손주 등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끈이 강한 것 같다. 나이 들면서 우리들은 그동안
알고 지낸 바깥의 지인보다
가족이라는 끈으로 주변이 좁아진다.
가족이 중요하다고 사회생활에 꼭 필요한 친구, 지인들을 멀리하면 안 되며, 이런
끈을
놓치지 않도록 그 끈을 잇고, 끊어 낼 때를 제대로 하는 것도 평생 공부이다.
삶이 지칠 때마다 학창시절 대학극장에서 자주 본
새뮤얼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
리며’ 연극이 보고 싶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를 43년째 만들어온 연
출가 임영웅씨는
‘아무리 다시 해도 늘 새롭게 여겨지는 것이 고도의 매력’이라고
한다.
이 연극의 주인공들은 꿈을 잊고 현실에 마음
아파하며 목을 매고 싶을지라도 한
가닥의 희망을 안고, 고도를 기다리는데 이것이야말로 삶에 대한 인간의 본능을
대변하는 것
같다.
가을에는 바람소리, 갈대소리 등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갈대소리가 그리
우면 강가나 늪지로 나가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 보자. 눈앞에 펼쳐진 갈대
밭의 스으윽 사아악 울어대는 갈대 소리에 취해 자신을 뒤 돌아 보는 삶은 가족,
친구, 지인 등 만감(萬感)이 오고 가는 착잡한 심정이 된다.
만추의 계절, 주말농장이 있는 두물머리 강가나 순천만의
갈대숲에 가서 가을을
보내주고 싶다.
색색으로 물들었던 길가의 풍성한 가로수도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쏟아지는
햇살에도 가슴이 허허로우니 늦가을이 지고 있다. 아들 둘 결혼했고 손주들이
자라니 필자의 인생도 어느덧 가을이 지나가고 있음을
느끼고 자신을 뒤 돌아
보게 한다.
가을이 가기 전 아내와 함께 자주 가던 인사동에 가야겠다. 가을 향기 풍기는
화가
들의 작품을 보면서 ‘우전’ 녹차 한잔하고 고궁에 떨어진 낙엽에서 만추의 삶을 즐
겨야지.
이처럼 문화를 즐길 수
있음에 감사를 표하다보면, 저 멀리 사하촌(寺下村)에도
곧 첫눈이 내리리라. 그때가 되면 필자의 시 ‘눈 내리는 날’을 암송하며 눈이
많이
내리는 강원도 백담사로 여행을 떠나야겠다.
중부매일신문 [오피니언] 아침뜨락 (2012. 11. 22.)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