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와 대마도(對馬島)
류 시 호 / 시인 수필가
조선왕조실록 중 세종대왕 편을 보면, 600 여 년 전 왜구(倭寇)의 노략질이 심하여 이종무 장군을
총지휘관으로 임명하고 병선 230여척, 군사 1만 7천명으로 쓰시마(對馬島)정벌을 한 기록이 나온다.
왜구는 13∼16세기에 우리나라와 중국 해안에서 약탈을 하던 일본인 해적들을 말하고, 왜구는‘왜
가 도둑질한다.’는 뜻으로 쓰시마·마쓰우라·이키 등이 근거지였다.
쓰시마는 본래 신라에 소속되었으나 차차 왜인들이 들어와 거주하게 되면서 일본 땅이 되었다. 대
마도는 일본의 막부시대 소 나오시게(宗尙重)가 점령하고, 도주(島主)가 되어 대대로 쓰시마를 관
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430여 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에는 일본 수군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당시 대마도 도주(島主)는 소 요시토시(宗義智)였고, 그의 장인이 고니시 유키나
가(小西行長)였다. 이들은 임진왜란 당시 선발대로 부산포로 쳐들어왔다.
전쟁이 끝난 후 전국시대를 수습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쓰시마의 소 요시토시에게 조선
과 강화교섭을 하라고 명령했다. 이 섬의 소 요시토시가 막 후 교섭으로 1607년부터 200년 간 조선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하였다.
그 뒤로도 대마도는 지리적 요건이 좋아 러일 전쟁에서도 전진기지로 활용되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전에도 조선 태종 때부터 조선국왕과 일본 막부장군이 양국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외교적인 현안을
해결하기 위하여 쓰시마를 통하여 사절을 각각 파견하였었다.
예로부터 대마도는 한국과 일본 열도 사이의 중계지로서의 위치 때문에 대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110 여 년 전 쓰시마 앞 바다에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가 일본의 연합함대에게 패하
자 일본과 러시아는 1905년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맺었다.
대한제국을 빼고 일본과 러시아의 조약으로 일본은 한반도에서 독점적인 지배권을 확립했고, 조선과
을사조약을 맺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식민지로 만드는 과정을 밟아 나갔다. 이즈하라 항은
매년 8월에 조선통신사를 소재로 한 아리랑 축제가 열리고, 부산에서 정기여객선이 운항되고 있다.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가 일제 강점기인 90 여 년 전 대마도 도주(島主)의 아들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와 정략결혼을 한 후 이 섬을 방문을 했다. 옛 쓰시마 도주(宗家當主)가 조선의 왕녀를 부인으로 맞이
하여 열렬히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이 섬에는 두 사람의 결혼을 기념하는 결혼봉축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두 분의 결혼을 축하
하여 대마도 거주 한국인들이 건립했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고난이 있었으나 딸 정혜(正惠)를 낳아
서로 신뢰와 애정이 깊었다.
그러나 양국관계는 갈등이 심했고 두 사람은 1955년에 이혼하였으며 소 다케유키가 먼저 죽고, 57년 전
귀국한 덕혜옹주는 낙선재에 머물다 30여 년 전 별세하였다. 쓰시마를 여행하며 조선통신사와 여러 가
지 역사를 생각해보고, 덕혜옹주의 결혼 봉축비를 보니 두 사람의 힘들었던 생애가 안타깝다.
이번 여행을 통하여 일본 열도와 한반도 사이 대마도의 중요한 역할을 다시 한 번 확인을 하게 되었다. 그
렇지만 이제는 한국과 일본 간에 분쟁은 줄이고 평화가 깃들어 함께 잘 살기를 빌어 본다.
중부매일신문 [오피니언] 아침뜨락 (2018. 04. 23)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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