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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과 장묘(葬墓)문화

경산2 2012. 6. 13. 13:57

  왕릉과 장묘(葬墓)문화

                                              경산   류 시 호 / 시인 ․ 수필가 

  오래전 아이들이 어렸을 시절, 조선시대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선대 할아버지의
서울 오류동 묘소를 간적이 있다. 생각보다 봉분과 재실(齋室)이 작아서 아쉬움이
있었지만 아이들 교육을 위해 조상의 묘를 찾아보았다는 것에 위안을 가졌다.

고속도로나 지방도로를 달리다 보면 멋지고 웅장하게 꾸며놓은 묘지를 볼 때가 있
는데, 그곳에 묻힌 분은 무척 고귀한 가문이거나 지방의 부호나 유지 중 사치논란
의 호화분묘가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우리의 관혼상제 의식은 유교와 성리학 때문에 의식이 까다롭고, 의례 때문에 형제
나 가문에서 다투기도 한다. 그런데 장례 문화에 대한 최고 권위자인 정종수 고궁박
물관장과 조선 왕릉에 대한 충북대학 이예성 교수 강의를 듣고 보니 한결 수월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조선시대 장례기간은 선비는 1개월장, 왕은 5개월장 이었고, 상례기간은 3년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왕은 나라 일을 봐야 하기에 장례기간을 1일을 1개월로 계산하는
데 이것을 역월제(易月制)라고 한다.

평민은 안 되고 왕만 가능하며 태종은 세종에게 자기의 장례를 13일 만에 끝내라 당
부했는데, 혹시라도 양녕대군이 변을 일으킬지 몰라서이다.

  그런데 왕릉에 기를 받기위해 신라는 평지에 크게, 고려는 산 중턱에, 조선은 흙으
로 언덕을 만들어 봉분을 만들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경우, 크고 위엄 있
게 만들었고 태조가 함흥에 살면서 함흥 억새를 좋아해 그의 능에는 잔디가 아닌
함흥 억새풀을 심었다.

  우리가 장례식에서 지팡이를 짚는 것은 상중에 못 먹어서 불편하니까 지팡이를 짚고,
상복을 입고 머리와 허리를 묶는 이유는 죄인으로 효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부친상 경
우에는, 대나무처럼 사시사철 생각을 하라고 죽장(竹杖)을 사용하고, 모친상은 매듭이

없기에 오동나무를 사용하며 오동나무가 없을 때는 버드나무를 사용한다. 양자로 간 자
식은 친 아버지 장례식에 대나무 대신에 오동나무 지팡이를 짚도록 차이를 두었다.

  외국의 장묘문화는 공원묘지에 모시는 경우가 많았는데, 전국적인 전염병 때문에 동
시에 많은 사람이 사망을 한 경우와 좁은 땅에 많은 사람이 살면서 묘지 난으로 화장
을 많이 하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종교적인 이유로 간소화 된 경우도 많다.

  고려시대는 불교식 화장이 성행했고 조선시대부터 10여 년 전까지 만해도, 유교의
영향으로 매장과 선산식, 호화분묘 등을 만들었다. 그러나 요즘은  30프로가 매장,
70프로가 화장을 해서 납골당에 모시고, 일부는 수목장으로 하고 있다니 좋은 현상이다.

좁은 땅에 많은 인구가 사는 우리는 3년상, 1년상, 불교식 49제 등 그동안 종교와 가문
에 따라 장례방식과 기간, 의식이 많이 달랐다.

  국제화시대 분주하게 세계로 활동하는 지금은 외국처럼 절차를 간단히 하였으면 한다.
이제는 남을 의식한 허례허식을 줄이고 3일장이나 5일장으로 모든 것을 간소화 하면 좋
겠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내실 있게 가능한 화장을 하고 조용하면서 고인의 명복을 비
는 것이 좋은 장묘문화라고 생각한다.

       중부매일 칼럼 [오피니언] 아침뜨락 (2012. 05. 03.)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