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잡지 발표

단종의 청령포 영월에서

경산2 2015. 2. 7. 21:42

 

  단종의 청령포 영월에서

                                   경산  류 시 호 / 시인 ․ 수필가

교직에 근무할 때, 국립고궁박물관연수를 받으면서 건국대 신병주 교수의‘조선왕조
실록’ 중 단종애사(哀史)와 충북대학 이예성 교수의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와 장릉
(莊陵)’에 대한 강의를 듣고 영월에 꼭 가고 싶었다.

지난 10월 중순, 가족여행으로 아내, 큰아들 부부, 작은아들 부부, 그리고 손주들과
같이 강원도 영월로 차를 달렸다. 단종 홍위는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혈기왕성한
삼촌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단종은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났지만, 상왕복위 사건으로 성삼문, 박팽년, 성승,
유응부 등이 사형당하고, 그는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떠났다. 이후 삼촌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사건으로 단종은 서인으로 강봉되었으며, 한 달 뒤인 17세의 나
이로 사사되었다.

  역사적으로 왕위는 부자간이나 형제간에도 다툼과 혈투가 많았다. 요즘도 대기업
경우, 재산문제로 형제간에 법정이 서는 경우를 많이 본다. 영월의 청령포는 비운의
왕이 유배생활을 한 곳이라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다.

배를 타고 섬으로 가며 단종의 가슴 아픔 시절을 회상하면서 금표비를 보니, 금부도사
왕방연의 시조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가 생각났다. 단종의 월중도
(越中圖)는 영월에 남겨진 장릉(莊陵), 청령포 등을 그림으로 제작한 8폭 화첩으로 유
명하다.

충북대학 이예성 교수는, ‘영월(寧越) 경내의 그림’이라는 뜻을 지닌 이 월중도의 제작
시기는 단종이 숙종에 의해 복권된 1698년 이후로 추정되고, 정자각은 보통 왕릉 앞쪽
에 짓지만 장릉은 자리가 없어 무덤 옆구리에 정자각을 지었다고 한다.

이 교수는 단종의 묘는 험한 산자락에 있었는데, 단종을 모시던 엄씨 일가가 세조 몰
래 단종 묘를 모래사장에서 옮겨놓고 이사를 가서 세상에 알려졌다고 한다. 점심은 공
무원인 작은 아들이 동료들과 체험 학습 차 이곳에 와서 먹었다는 삿갓고을 송어집에
갔다.

그동안 여러 곳에서 송어회를 먹었지만 이렇게 색깔이 선명하고 맛있는 송어는 처음
이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다. 속담에 음식이 맛이 좋으면 나무칼로 귀를 베어도
모르겠고, 배가 부르면 평안감사도 발아래 보인다고 한다. 손주들은 음식점내 양식장
의 깨끗한 물에 자라는 송어들과 철갑상어를 보면서 좋아했다.

  식사 후, 정선읍이 고향인 큰 며느리가 영월 탄광문화촌을 안내했다. 석탄이 검은
황금으로 불리던 80년 중반까지 흥청거렸지만, 이제는 아련한 탄광의 향수와 옛 기
억으로 떠올리게 한다.

생활관내 만물상회, 이발관, 공동변소, 복지회관 등을 보니 돈을 따라 이동한 사람들
흔적을 보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교실의 연탄난로는 난방시설이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나게 한다.

  감자, 옥수수, 송어, 동강의 아름다움 등을 뒤로하고 달리며, 차창 밖을 바라보니
노을 지는 푸른 산들이 너무 아름다워 보인다. 가끔씩 여행을 통하여 생활의 변화
를 주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자신의 발전에 좋다고 생각한다.

가슴이 답답할 때 훌훌 털고 강원도 영월에 가서, 역사의 현장과 탄광체험 등 문화
활동도 하며 가정의 분위기를 바꾸어 보자.

      중부매일신문  [오피니언] 아침뜨락 (2014. 11.28.)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