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저녁이 가까워 오고 있네요. 요즘 날씨는 더 없이 좋은데 과수와 농사에는 냉해로 도움이 안된다하네요. 그 래도 회사의 아카시아향이 너무 좋아 기분은 굳이랍니다. 회사 일을 하다보면 관청을 가끔씩 가야하는데 그때마다 느낌이 좋지를 않더군요. 특히 요즘 뉴스에서 보면 과연 공직자가 저렇게 해도 되는지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공직자들의 자세를 얘기할 때는 흔히 내가 좋아하는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가 인용되곤 하는데 강진 유배지에서 쓰여진 이 책에는 목민관이 지켜야 할 6가지 계 율이 있지요.(18년간 귀양 살이는 죽음과 같지요)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마음을 정갈하게 하고,가정을 바로 다 스리고,청탁을 물리치고,철저히 절약하고,즐겨 베풀라는 것 이랍니다. 곧은 마음과 곧추선 자세야 말로 행정을 하기에 앞서 목민관 이 가져야 할 덕목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요. 오늘날까지 청백리로 회자되는 세종대왕 시절의 방촌 황희와 고불 맹사성 도 따지고 보면 이런 원칙에 충실했던 대신들이라고 하지만, 지난번 이미 내가 말했었지만 영의정 황희는 사람좋은 청백리 정승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록 속에 등장하는 그의 이야기는 당혹스러운데 그는 매관매직으로 돈을 벌었고 남의 아내와 간통했다고 실록에 적혀 있답니다. 그는 야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도 좋고 저도 좋다고 말하는 호인(好人)도 아니며 그는 세종에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정치가였고, 국가 미래를 내다보는 정확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세종은 그의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중용했답니다. 그런데도 검소하고 청렴결백했으며 성품이 소탈했다고 하네요. 그렇지만 평생 변변한 거처 없이 지내던 고불 맹사성은 우의 정이 돼서야 겨우 집 한칸을 마련할 수 있었으나 그나마도 청빈거사의 집답게 허술하기 짝이 없었는데 어느 날 집을 찾아온 병조판서와 함께 국사를 논의하던 중 소 낙비가 쏟아지자 지붕이 새 삿갓을 쓴 채로 대화를 계속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며 지금의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온다는군요. 우리 역사에 보면 유달리 청백리들의 행적이 눈에 많이 띄는 데 조선시대 '전고대방(典故大方)'에 2백19명,'청선고(淸選考) '에 1백86명이 올라있을 뿐만 아니라 '고려사'에도 많은 대신 들의 행적이 귀감으로 기록돼 있다는군요. 공직자라면 누구나가 지켜야 할 금도(襟度)를 소홀히 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도덕적 책무)를 무시한 탓이지요.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부인이나 친척의 탓으로 돌리면서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도 볼썽 사납지요. 국무총리나 기타 힘 있는 기관장 청문회를 하면 어찌 그리 말 많은 재산을 모운 사람들이 많은지? 우리 속담에 오이밭에서 신발 끈을 고쳐 매지 말고 오얏 나무 밑에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고 했는데 의심받을 짓 은 아예 하지 말라는 얘기이지요. 조선조 정조대왕의 신하 였지만 다산 같은 분이 요즘 필요 한 세상이 아닌지??? 세상이 험해도 우리 카페님들 멋진 저녁이 되시길, 굳 바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