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알고 보면 쉬운 왕가의 여자들---

경산2 2005. 6. 4. 18:27

연휴가 시작되는 토요일 저녁이군요. 지금은 서울 집에 이랍니다.

주중에 지방에 있는데 오늘은 연휴이고 어머니 제사가 있기에 집

에 있답니다.

이런 날은 동생들도 오고 한국의 유교 특징이 이렇게 형제 간 1년

에 몇번씩 만날 수 있게 해서 좋은 점도 있지요. 평 민인 우리도

이렇게 어머니 기일에는 모이고 제사를 모시는데 엣날 제왕시절

군주야 대단했겠지요.

그중에 조선 시대 52년간이나 군주를 한 영조 경우 '무수리'
출신 어머니 기일에 친필로 '숙빈최씨 제문'을 썼는데, 어머
니에 대해 각별한 사랑을 표현한 국왕이 쓴 유일한 제문이라
는군요.

원래 임금의 제문은 신하들이 쓰는 것이 관례지만, 영조는 왕
위에 오른 지 2년째 되던 1726년 11월 6일 ‘숙빈최씨치제문
초(淑嬪崔氏致祭文草)’를 직접 쓰고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절절하게 토로했군요.

나두 군대에서 제대하는 해인 25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지요.
영조는 친어머니의 제사를 지내기도 어려웠는데 한 나라의 국
왕으로 일개 후궁의 제사를 직접 지낼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1670 ~1718)는 일곱 살에 궁에 들어와
숙종비 인현왕후 처소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미천한 신분이었으며
1689년 인현왕후가 폐비된 후 왕비의 생일상을 차려놓고 혼자 눈
물 짓다 숙종의 승은(承恩)을 입었다고 전해진답니다.

아들 셋을 낳고 숙빈에 봉해졌으나 둘째 아들(영조)이 임금이
되기 전 49세 나이로 눈을 감았는데 어머니가 ‘무수리’ 출신
이라는 사실은 영조의 재위기간 내내 커다란 멍에였지요.

조선시대 궁녀는 왕의 전성기인 영조때는 600 명,후퇴기인 고종,
순종때는 200 여명 이었다 하는군요.(백제의 의자왕 3000궁녀는
대단한 것이었지요)

왕이 기거하는 궁에서 한평생 살다 죽지만,어느날 왕과 눈이 맞아
하룻밤을 보내면,'특별상궁'이 된다나, 한때 왕과 가까이 지내면
후궁이 되고,종1품-종4품까지 올라가니 대단하지요.

숙원(종4품), 소원(정4품),숙용(종3품),소용(정3품), 숙의(종2품),
소의(정2품), 귀인(종1품)이라니 과거 급제 해도 이렇게 많이 올라
가기 힘들지요.

후궁 출신중 아들이 세자나 왕이 되면,(왕)비는 안되지만, 빈이
된다고, 그래서 장희빈,영조의 생모(후궁출신)도 숙빈최씨, 이렇게
궁녀도 출세할 수가 있지요.

여자들은 왕조시대나 지금도 남편 잘 만나면, 영부인도 되고, 누군
가가 청와대시절 잠자리에서 다리를 꼬집어며 꿈이냐 생시냐 이런
말 10 여년전 나왔다는데 최근에는 이런 말 안하고 사는지????

이렇게 살아온 후궁들의 자식들(왕)이 생모를 모신 묘궁들을 함께
모신 것이 7궁이라 합니다. 왕비는 종묘로 가고 후궁 중 왕의 생모
만 7궁으로 보냈는데 영조가 자기 어머니를 합쳐서 6궁에서 7궁으로
만들고 궁정동과 가까이 있고 청와대 옆이라 한동안 7궁은 미공개
하다가 YS시절 부터 개방을 했답니다.

영조가 한이 많은 사람이라서 왕권에 욕심을 부렸는지 아니면 정말
사도세자가 바보인지? 당파 싸움에 그렇게 화려한 시절의 영조가
친위대에 당한지는 모르지만 왕 자리를 아들에게 안주고 손자인
정조에게 물러 준 임금이지요 ㅎㅎㅎ

그래도 왜놈이 넘보지 않을때 왕권을 쥐고 있었으니 선조처럼 고생
은 안했지요. 우리가 영정조 시절이 조선시대 문화부흥 시절이라고
칭하지요. 정조 주변에도 좋은 신하가 많았지요.

누구나 주변에 좋은 친구나 벗이 있으야 삶의 보람이 있겠지요. 여러
분 즐겁고 건강한 연휴되세요, 바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