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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알람브라 궁전과 콜럼버스 / 류시호 작가

경산2 2019. 8. 4. 07:55




    알람브라 궁전과 콜럼버스

                                             류 시 호 / 시인 수필가

지난 1월에 끝난 현빈과 박신혜 주연의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드라마로 본적이

있다. 그리고 젊은 시절 푸른 밤하늘에 울려 퍼지던 아름다운 기타연주곡 프란시스코 타레가 작곡의 ‘알람

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매력적인 멜로디가 생각난다.


이 곡은 사랑 고백에 실패한 타레가가 이 궁전 정원에서 실연의 아픔을 담은 전설의 명곡을 썼다. 애잔한 선

율 때문에 많은 청년들이 기타를 잡았고 그 궁전에 꼭 가보고 싶었다.  그라나다에 도착하니 더운 날씨였지만,

 ‘알람브라 궁전’을 생각하니 마음은 이슬람 세계의 탐구심과 호기심이 발동을 하였다.


영국의 작가 아서 C. 클라크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고 했는데, 이 궁전을 보면 고

대의 마법과 현대의 과학이 같은 근원을 갖고 있는 것을 느낀다. 최근에 본 아라비안나이트 천일야화에 나

는 ‘알라딘’이라는 영화와 비교하면, 우리의 삶은 항상 요술램프, 마법 양탄자 같은 꿈과 희망을 생각하게 한다.


1492년 에스파냐는 매우 기념비적인 위업 두 가지를 달성했다. 스페인은 이탈리아 탐험가 콜럼버스를 지원

하여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는데 일조했고, 에스파냐의 이슬람 왕조인 그라나다왕국을 점령하여 통일을 이

루었다.


그라나다는 스페인의 가톨릭 군주인 페르난도 왕과 여왕 이사벨에게 항복함으로써 에스파냐 남쪽 지역에 800

년 이상 계속된 이슬람의 역사를 마감했다. 콜럼버스는 포르투갈 국왕에게 후원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스페인으로 눈길을 돌렸다.


관광버스에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 대한 영화를 보았다. 1492년 8월 그는 세 척의 배에 승무원들과 스

페인의 파로스 항을 출항했다. 네 번째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콜럼버스는 건강을 잃었다. 인도항해를 실천에

옮긴 도전정신의 콜럼버스 덕분에 스페인은 세계 최대의 해양강국이 되고 부자나라가 되었다.


이처럼 콜럼버스의 서인도 항로발견으로 아메리카대륙으로 활동무대가 넓어졌고, 에스파냐가 주축이 된 신대

륙 식민지 경영도 시작되었다. 그 후 유럽 선두주자는 영국으로 이동 후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로 옮겨졌다.

그런 점을 보면 우리도 식민지 생활을 청산하고,


 6.25전쟁을 치룬 후 60~70년대 조국 근대화 사업으로 급격한 성장을 했다. 5천년 역사 중 이렇게 잘 사는

나라가 되리라곤 선조들도 예상 못했다. 그런데 문명교류학자 정수일 선생은 ‘세계 속의 한국’에서 신라는 9세

기에 아랍을 포함한 중동과 유럽 세계에 ‘동방의 이상향’으로 알려졌다고 했다. 


 그는 바그다드 박물관에서 알 이드리시 지도를 보았는데, 1151년에 아랍어로 신라를 표기한 것을 확인했다.

세계화 시대를 선도하는 무역국가 한국의 DNA는 신라시대부터 형성되고 개방정책 때문이다. 세계를 향해 열

린 한국의 역동적인 모습은 1천2백 년 전 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로 이어져 갔다.


에스파냐의 콜럼버스가 개척정신으로 신대륙 탐험을 하였듯 우리는 이병철, 정주영, 구인회, 신격호, 박태준,

김우중 등 산업화의 선구자들이 남다른 비즈니스적인 철학과 열정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꿈을 이루었다. 9세기

부터 신라가 아랍을 포함한 중동 그리고 유럽세계와 교류 한 것처럼 한국의 DNA는 지금도 살아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여행하며, 대한민국의 저력을 다시 느꼈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인 것을. 뉴스 시선집중

(2019. 08. 05)발표 /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