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원고가 길지만 참 좋아요. 끝까지 읽어 보셔요.
봄으로 가는 길목 ‘청산도’
류 시 호 / 시인 수필가
지난해 11월 중순, 완도를 거쳐서 청산도에 갔다. 청산도는 그동안 2번이나 시도했지만 날씨 때문에 완도 여객
터미널에서 배를 타지 못하다가 가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이번 여행은 관광버스를 타고 가이드 안내를 받으며
갔더니 편리하였다.
가을의 끝자락을 느끼며 남도의 섬 여행은 떠나는 자체만으로도 스트레스가 확 날라 갔다. 완도를 생각하면 오래
전 증평읍에서 같이 근무한 C여선생이 생각난다. 그는 완도에서도 다시 배를 타고 가는 외딴섬이 고향으로 목포
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청주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정말 먼 곳에서 충청도에 정착한 사람이다.
그래서 완도를 이야기하면 억척스럽고 부지런하고 열정을 가진 동료 교사가 떠오른다. 이 섬은 1968년 12월 연
륙교가 개통되어 육지화 되었고 소나무, 참나무 등 온대성 식물에서부터 후박나무, 비자나무 등 아열대성 식물과
인근의 주도(珠島) 상록수림은 천연기념물 제28호로, 군외면 대문리 모감주나무 군락은 천연기념물 제428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흥덕왕 3년, 현재의 완도 일대에 장보고 장군이 신라인들이 당나라에 노예로 팔려가는 것을 막고 무역을 하
기위하여 청해진을 설치하고 중국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완도는 미국 골프계에서 맹활약을 하는 최경
주의 고향으로 고등어·도미·삼치·갈치·멸치·장어 등의 어족이 풍부하고, 전국 제일의 수산 양식장으로 특히 김·미
역·굴·전복 양식업이 활발하다.
최근에 연속극 ‘해신’과 슬로우시티 ‘청산도’ 때문에 해양관광지로도 인기 있는 곳이다. 청산도는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촬영되면서 관광명소로 주목받기 시작하였고, 드라마 ‘봄의 왈츠’도 이곳에서 만들었다. 4월이 되면
섬의 들판을 유채꽃과 청보리가 뒤덮고, 나지막한 돌담을 따라 유채와 청보리 밭이 조화롭게 절경을 이룬 멋진
곳이다.
이곳에는 남방식과 북방식의 고인돌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고인돌 때문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한 것으로 추측
하고 세계 고인돌의 40%가 우리나라에서 발견되고 있다. 1960년대 청산도 일대에서는 고등어와 삼치가 많이 잡
혀 파시(波市)가 열렸으며, 완도까지는 뱃길로45분이 소요되며 공기가 맑고 산과 바다가 푸르러서 청산(靑山)이라
고 한다.
청산도는 어업보다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더 많고 산 지형을 따라 구들장 논과 계단식논(다랑이 논)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계단식 다랑이 논과 흙을 전연 사용하지 않은 돌로만 쌓은 돌담 덕분에 이 섬은 자연미가 흐르고 농촌
풍경이 여유로워 보여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인정을 받았다.
특히 구들장 논은 산비탈 자투리땅을 개간하였으나 땅에 돌이 많아 물이 잘 새고 논을 만들어도 물을 가둬놓지 못
해 벼농사가 어려웠다. 그래서 16세기부터 땅에 온돌 난방에 사용되는 구들장을 몇 겹으로 쌓은 뒤 그 사이를 진
흙으로 메워 물이 새지 않도록 해 논을 만들었다.
농림수산식품부는 선조의 지혜가 담긴 구들장 논을 보존하기 위하여, 지난 1월 국가 중요 농업 유산1호로 지정하
였다고 한다. 남도 에서는 초분(草墳)이라는 특별한 장례가 청산도와 진도 등 일부 섬에 남아있다. 작년 국립고궁
박물관 연수 때 장례문화의 국내 최고권위자인 정종수 관장의 강의에서도 초분에 대하여 강조한바가 있다.
초분은 시신을 바로 땅에 묻지 않고 3년간 풀이나 소나무가지로 덮어두는 가묘(假墓)로 두었다가 뼈만 매장하는 장
례법으로 다큐멘터리 감독 정수웅이 1977년 다큐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골든 하프상’ 국제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으
로 알려졌다.
이 장례문화는 환태평양 지역에서 내려온 장례풍습으로 다 사라지고 이곳에만 남아있다. 이 지역 사람들은 가족이
고기잡이 나가고 없는 틈에 상을 당하면 매장해버리지 않고 기다렸다는 설과 지극한 효심 때문 초분이라는 장례를
했다고 한다.
이 섬은 소나무가 많은 게 특징이고 북측 순환도로에는 단풍나무를 많이 심어 가을을 즐기기에 좋아 보인다. 해가 서
서히 내려앉고 눈에 드는 사물들의 윤곽이 아스라해지기 시작할 무렵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넘어 지는 해를 바라보았
다. 석양을 바라보며 숙연함을 느끼는 것은 인간 모두의 보편적인 감성일 것이다. 낯선 곳에서 노을과 이마를 맞대니
왠지 모르게 마음도 절로 차분해졌다.
늦가을 낙엽은 도심거리나 농촌, 어촌 등 어디라도 지천이다. 눈부신 초록을 자랑하던 호시절이 그리운지 펄럭펄럭
한참동안 허공을 휘저으며 떨어진다. 낙엽은 겨울을 나고 푸른 내년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새로운 싹을 틔우기 위해
힘을 비축하여 봄날 나무에 싹을 틔울 밑거름으로 변한다.
춥고 길었던 겨울이 가고 벌써 꽃샘잎샘이라니 몇 번은 변덕스러운 봄추위의 시샘을 겪어야 하겠지만, 절기의 흐름
은 속일 수도 이길 수도 없다. 대자연의 향기를 느끼고, 산수의 풍광을 맛보면서 살아야 하는데 긴 겨울을 도시에 찌
들려 살고 있으니 답답하다. 삶의 틈새를 내어 자연의 숨결을 불어 넣어야 여유가 있는 것 아닐까 한다.
간절히 바라며 기다렸던 사람에겐 더욱 반갑게 다가오는 새로운 계절, 새봄을 맞이하여 유채꽃과 청보리가 있는 청
산도에 다시 갈려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뛴다. 인생이란 가끔은 눈을 질끈 감은 채 하고 싶은 것하며 살아야 아름다
운 삶을 유지할 수가 있다.
겨우내 얼어 있던 생명들이 봄을 재촉하는 비를 맞아 생명의 고동을 울리는데, 우리들 삶도 이처럼 때에 맞게 흘러
가면 좋겠다. 문지방에 턱을 괴고 바라본 하늘에는 봄기운이 감돌고 아파트 화단의 나무에는 새잎이 돋고 있으며,
흙내 물씬 풍기는 가느다란 풀꽃들이 풀 향기 한 움큼을 코끝에 뿌려준다.
봄꽃이 아름다운 건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전령이라는 특별한 직책과 추위를 견뎌 낸 강인함, 두려움 없이 눈밭에
서 꽃을 피우는 투지 등의 기품이 있기 때문이다. 끝없이 순환하는 생명 속에서 제일 먼저 봄을 알리는 매화는 우리
에게 큰 감동을 준다.
퇴계 선생은 매화의 맑은 꽃에서 인간이 지녀야 할 내면의 청진(淸眞)한 상징을 보았다며 그래서 매화를 좋아한다
고 했다. 봄은 우리를 힘겹게 했어도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 없기에 조바심 내며 쫓아다닐 일은 아니다. 봄의 기운
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것을 보고, 봄을 영어로 스프링(spring)이라고 하는가 보다.
흔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풀잎이 속삭이고 겨우내 웅크렸던 만물이 봄을 맞아 용수철처럼 밖으로 튀어나오면
좋은 소식들이 많이 들려올 것 같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식물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매년 식물은 꽃을
피우려고 봄 가뭄과 거친 바람을 이겨낸다.
봄을 기다리는 것은 식물뿐만 아니라 사람도 애타게 기다리는데, 꽃샘추위를 이겨낸 봄꽃을 보노라면 누구나 행복
함을 느끼게 한다. 멀고도 긴 삶을 살면서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사랑과 배려, 나눔을 주어야 진정한 행복을 누
릴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긴 겨울 추위에 옹송그리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따스한 말 한마디, 나눔과 배려를 행하면 천사가 된다. 행복의 본질
은 사랑과 나눔이며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배려를 통하여 행복을 누리고 만족스런 삶을 얻는다. 봄이 오는 소리에
제비들이 찾아오고 씀바귀도 자라서 우리의 입맛을 돋우어 줄 것이다.
유채꽃과 청보리가 우리에게 아름답게 보여주려고 단장을 하고 기다릴 터인데, 바람에 잎을 다 잃기 전에 가야겠다.
봄으로 가는 길목 청산도야! 노랑과 초록의 빛을 포기하지 말고 새잎을 틔우며 봄의 문을 활짝 열어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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