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비와 자주동샘 수필이 길지만 끝가지 읽어보세요. 좋습니다.
단종 비(妃)와 자주동샘 그리고 청룡사
류 시 호 / 시인 수필가
작년에 강원도 영월을 여행하며 단종의 가슴 아픔 시절을 회상하면서 포구에서 배를 타고 청령포 섬으로
갔다. 이곳에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17세의 나이로 사사되었던 곳이며, 금부도사 왕방연의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라는 시조비와 금표비가 있는 곳이다.
단종 홍위는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혈기왕성한 삼촌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단종은 왕위를 내
놓고 상왕으로 물러났지만, 상왕복위 사건으로 성삼문, 박팽년, 성승, 유응부 등이 사형당하고, 그는 노산군
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떠났다. 영월의 청령포는 비운의 왕이 유배생활을 한 곳이라 많은 사람들이 방
문한다.
얼마 전, 대학 기숙사 선후배들과 역사를 전공한 고교교사 K 선생의 안내로 서울 낙산과 단종 부인
의 애틋한 사랑이 깃든 자주동샘, 동망봉, 청룡사 등의 문화탐방을 했다. 먼저 동대문 옆 이화여대
병원 자리에 새로 건축한 한양도성박물관에 갔다.
이 박물관에는 600년의 한양도성 역사가 잘 정리되어 있다. 기획전시실에는‘창의문과 사람들’이
라는 전시를 하고 있었다. 창의문은 숭례문 화재 이후 가장 오래된 도성문루로 성문의 가치와 특징
을 조명하고, 조선 후기 도성방어체계와 창의문의 역사, 그리고 이 문을 통하여 인조반정 등 역사
적인 사건을 알도록 전시하고 있다.
특히 50여 년 전 1.21 사태 후 수도방어를 위하여 폐쇄되었다가 다시 개방되었다. 이어서 낙산공원
으로 올랐다. 낙산은 서울의 형국을 구성하던 내사산(남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의 하나로 풍수지
리상 주산인 북악산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으로 동쪽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니 너무 아름답다.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는 낙산은 일제 강점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상당 부분이 파
괴되고 소실되었다. 특히 무분별한 도시계획으로 낙산은 아파트와 주택이 잠식하여 역사적 유물로
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낙산 동쪽 비탈에는 비우당(庇雨堂)이라는 초가집이 한 채 있다. 비우당은 조선의 실학자인 지봉 이
수광이 살던 곳으로 지봉은 이 집에서 ‘지봉유설’을 지었다고 한다. 이수광의 집은 아주 작은 초
가집으로 조선 사대부의 청빈함을 느낄 수 있다.
비우당이란 근근이 비를 가린다는 뜻으로 청빈하게 살았던 지봉의 삶을 알 수 있다. 이수광이 죽은
후 조선의 선비들은 지봉의 청빈함을 배우기 위해 이 집을 찾았고, 특히 지방에서 과거를 보기 위해
올라온 선비들이 이 집을 들러본 후 청빈함의 사표(師表)로 삼았다.
지봉유설은 이수광이 세 차례의 중국 사신으로 얻은 견문을 토대로 4백 년 전에 간행한 백과사전이
다. 이 책은 그 당시 조선과 중국·일본·베트남·오키나와·타이·자바·말레시아 등 남양 제국과
멀리 프랑크(서유럽제국)·영국 같은 유럽의 일상 까지도 소개하였다.
이 사전을 통하여 4백 년 전 조선시대 사람들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알 수 있다. 당시의 학자 남창
김현성은 이 책의 서문에서“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총명을 계발하게 하고,----- 귀머거리에게 세
귀가 생기고, 장님에게 네 눈이 얻어짐과 같아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책의 가치를 평했다.
비우당 뒤에는 자주동샘(紫朱洞泉)이라 불리는 작은 샘이 있다. 지금은 물이 끊겨 흔적만 남아 있는
데 자주동샘은 단종의 부인 여산 송씨 정순왕후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그녀는 15세에 단종과 혼례를
치루고 왕비가 되었으나 계유정난으로 단종은 영월로 유배되고, 18세의 정순왕후는 서인으로 강등되
어 궁 밖으로 쫓겨났다.
단종 비(妃)는 동대문 밖 청룡사 부근에 초가를 짓고 천에 염색을 해서 생계를 꾸렸다고 한다. 그때
그녀가 이 샘에서 빨래를 하면 신기하게 자주색으로 염색이 되었다고, 이 샘을 자주동샘이라 부르고
샘 옆에는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단종의 죽음 소식을 접한 비(妃)는 그녀가 8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매일 아침 집근처 동망봉(東望
峰)에 올라 동쪽인 영월을 바라보고, 단종의 명복을 빌었으며 그녀의 비탄한 울음소리가 산 아래 마
을까지 들렸다.
이에 마을 아낙들도 그녀를 동정해서 가슴 한 번치고 울고, 땅 한 번치고 울고, 하늘 한 번 쳐다보며
같이 울어‘동정곡’이라 불렀다고 한다. 낙산 부근에는 동망봉 외에 단종 비의 흔적이 또 있는데 그
녀가 불가에 귀의했던 청룡사가 있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죽은 뒤 이 절에서 비구니 허경스님으로 지냈다고 한다. 천년 역사의 청룡사에는
중국에서 학위를 받은 비구니 주지 진홍스님이 한국 비구니 원조인 이 사찰에 대하여 안내를 잘 해주
었다. 이 절에서‘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영조 친필의 비석을 보았는데, 정업원구기는 업이
정해진 사람이 살던 옛터라는 뜻이 담겨있다.
'정업원'은 고려 풍습이 남아있던 조선 초기 자식이 없는 후궁이나 결혼 후 남편을 잃고 혼자 살아야
하는 왕실의 여인들을 위해 세웠던 절을 의미한다. 그리고 단종부부의 사랑이 산과 바위처럼 천만년
동안 영원할 것이라는‘전본후암어천만년(前峯後巖於千萬年)’영조의 친필 편액이 걸려있다.
영조는 단종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모두 복권시켰고, 청룡사에 와서는 단종 비의 이야기를 듣
고 눈물을 흘리며 친히 비문을 썼다고 한다. 이 사찰은 고려를 개국한 왕건의 어명으로 개창(開創)하
였고, 고려와 조선의 왕실 여인들이 이 절에서 불도를 닦았다.
그리고 조선조에는 왕실 정원업의 기능까지도 수행한 가람이라고 주지 진홍스님이 설명을 했다. 청룡
사는 단종 비 외에 고려 말 공민왕비 혜비와 조선 태조의 딸인 경순공주 등 왕실의 여인들과 내명부
여자들이 출가하여 불도를 닦았던 곳으로 유명하다.
청룡사가 왕실에서 물러난 여인들의 불도를 닦던 곳이라면, 종로구 청와대 옆 7궁은 왕후가 되지못한
왕의 생모들을 죽은 뒤 종묘에 제향하지 못하여 별도로 위패를 모신 곳이다. 7궁에는 선조의 후궁 안
빈김씨, 숙종의 후궁 희빈장씨와 숙빈최씨(영조의 생모), 영조의 후궁 정빈이씨와 영빈이씨, 정조의
후궁 수빈박씨, 그리고 고종의 후궁 귀비엄씨 등 7명의 신위를 모셨다.
최근에 끝난 드라마 징비록이나 조선왕조실록 등을 보면 왕후, 빈, 제조상궁 등 궁중 여인들 입김이 대
단함을 느낀다. 대한민국의 귀부인들 대통령이나 장관, 국회의원 등을 잘 보좌하면 좋겠다. 산울림 소
극장에서는 제1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한 김별아 작가의 소설‘영영이별 영이별’을 원작으로 비운의 왕
단종과 그의 비 정순왕후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를 주제로 한 박정자의 낭독콘서트가 있었다.
어린 왕과 비는 2년 남짓 궁궐생활을 하며 권력의 피바람 속에서 버티다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왕비
는 서인, 걸인, 날품팔이꾼, 스님으로 살다 세상을 떠나게 된다. 박정자는 소설 속 주옥같은 문장을
애절한 소리를 내는 해금과 기타 연주에 맞추어 낭독하여 드라마나 영화보다 더욱 감성적이었다.
역사는 언제나 패배자에게 등을 돌리고 승리자를 옳다고 하지만, 괴테는‘역사의 의무는 진실과 허위, 확
실과 불확실, 의문과 부인(否認)을 분명히 구별한다.’고 했다. 세조는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동생 안
평대군과 단종을 죽였지만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강등되지 않았다.
역사 속 많은 군주들이 단종과 수양대군처럼 권력과 명예 때문 왕위 다툼을 하였고, 가끔씩 재벌 자녀들의
재산싸움 뉴스와 총리, 장관 후보자들이 청문회에서 권력과 돈 때문에 패가망신(敗家亡身)하는 것을 보면,
조선시대 근근이 비만 가리며 청빈하게 살았던 이수광의 초가집 삶과 비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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